70년대가 무척이나 옛날같이 느껴집니다. 저 역시 70년대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그 만큼 세월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산다는 이야기겠죠.
70년대 말 저는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주 어린 꼬맹이였습니다. 그 때의 만화나 영화에서 보여준 2000년대는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로봇이 우리의 삶의 어려움을 모두 해결해 주는 환상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2000년대에 들어서고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삶은 그렇게 크게 변하지 않았네요. 물론 그 시절에 비해 우리 삶의 질이나 컴퓨터로 대표되는 기계문명은 많이 발전했지만, 만화나 영화가 보여주던 꿈과 환상의 세계는 아직까지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전 기억을 그리워하며, "그때 그 시절"의 향수를 그리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향수가 미치도록 그리워진다면,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안성으로 떠나보세요. 그곳에는 우리의 어린시절 모습이 일부나마 남아있기 때문이죠.
안성 천변에 위치한 추억의 6070거리 입구입니다. 우리네 옛날 시장의 입구 같기도 한 모습이 정겹기도 합니다.
입구 옆에 위치한 동선네 구멍가게... 원래는 예전 구멍가게처럼 허름했다고 하는데.. 최근 리모델링을 거쳐서 간판만 예전 구멍가게로... 모습은 최신 조립식 주택으로 T.T
맞은편에 위치한 우전 대장간. 예전 시골의 장터에 나가면 이가 빠진 칼이나 낫, 녹슬은 망치 등 오래된 농기구를 가져다 주면 명품으로 바꾸어 주시던 요술쟁이 대장장이 아저씨들이 계셨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제 나이가 그런 모든 것을 알만큼 많이 먹지는 않았지만, 강원도 산골에 살았던 관계로 남들보다 예전 모습을 더 많이 기억하는 듯 합니다.
정미소는 예전 마을 어귀마다 하나씩은 꼭 위치하고 있었는데요. 작은 정미기가 나오면서 각 농가마다 정미기를 보유하게 되고, 이로인해 정미소는 할 일을 잃어버리게 되었죠. 지금은 각 마을에 위치해 있는 정미소는 대부분 망해 흉물스러운 폐가로 변해버렸고, 사람들은 정미기를 이용하거나 농협에서 운영하는 대형 정미소에 쌀이 아닌 벼를 파는 시대가 되었죠.
어릴적 기억으로는 쌀을 찧는 날이되면 동네 분들이 리어카로 달구지로 수확한 벼를 실어다가 정미소 앞에 모여 이야기 꽃도 피우고, 막걸리 판도 벌리셨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은 가전제품을 구입하려면 인터넷 쇼핑이나 대형 브랜드의 대리점, 또는 OO마트 등으로 가지만 예전에는 동네마다 전파사가 있어서 그 마을의 가전제품을 책임지곤 했었죠. 판매부터 수리까지 원 스톱 시스템이라고나 할까요? 전파사에서 틀어놓는 TV를 보기 위해 자리를 깔고 앉아서 마을 사람들이 모였던 기억들...
어릴적 저희 집에는 TV가 한대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마을에 TV가 3대 정도 있었는데, 그 중 한 곳이 저희 집이었다고 하시더군요. "여로"가 할 시간이 되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들어 집에도 가지 않고 눌러 앉아서 보는 바람에 불편하기도 했다는 예전 이야기가 이제는 우스개 소리로만 들립니다. 지금은 휴대폰을 이용해 DMB를 보고, 인터넷을 이용해 다시 보기도 할 수 있고, 대부분의 집에 TV는 두대 이상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시대가 되기도 했죠.
마을의 주요 에너지 공급원인 연탄 직매소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저희집에는 연탄 보일러를 사용했던 것으로 기억되네요. 연탄 불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서 연탄불을 갈아야 했던 기억들.. 연탄불을 갈기위해 아궁이를 열면 확하고 퍼져오던 매캐한 일산화탄소 냄새. 겨울만 되면 뉴스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일가족이 사망했다는 안타까운 뉴스들이 들려왔었고... 불이라도 꺼졌으면, 옆집으로 불을 빌리러 갔던 생각도 납니다. 번개탄은 나중에 나왔던것 같네요.
요즘 번개탄은 연탄불을 붙이기 위한 도구라기 보다는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먹기 위한 하나의 연료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은 듯 합니다.
연탄하면 떠오르는 추억 하나.. 바로 연탄집게입니다. 말 안듣는 자식들에게 훈계를 내리기 위한 중요한 도구였죠. 30대 후반 이상이신 분들 중 사고를 많이 치셨던 분들은 연탄집게로 맞아본 기억이 한두번 쯤은 있지 않을까 하네요.
어린 시절 참 많이도 들락 거렸던 만화방도 있습니다. 만화방 구석에서 만화도 보고, 만화방에 따로 마련된 방 안쪽에서는 주인 아저씨가 비디오를 틀어주며 짭잘한 수익을 올리기도 하셨죠. 최초의 비디오방이 바로 만화방이었죠.
만화방에 있는 난로에 쫄쫄이를 구워먹으며 보는 만화책... 추억의 맛이 더 해져서 이제는 어딜 가서도 그런 맛을 볼 수는 없을 듯 합니다.
말 잘 듣는 꼬맹이에게는 만화책 몇 권을 공짜로 보여주셨던 아저씨의 모습이 기억날 듯 말듯... 그리고 담배 냄새와 쫄쫄이 구워지는 냄새, 책에서 풍겨나오는 곰팡이 냄새가 뭉쳐져서 풍겨오던 구릿구릿한 추억의 냄새가 코 끝을 스치듯 합니다.
이제부터 보여드릴 사진은 그때 그 시절의 포스터들입니다.
국가 정책에 대한 홍보를 지금은 인터넷으로 방송으로 하지만, 그때는 이런 포스터들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광고매체였을 겁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길의 벽면에 구호나 그림으로 된 포스터들을 붙혀놓는거죠.
위생에 대한 개념이 빈약했던 시기. 국민계몽 캠페인의 일환으로 제작된 표어 포스터와 제품 홍보 포스터.
가족계획 포스터 입니다. 지금은 아이들을 낳지 않아서 문제이지만 그때만 해도 가족 계획을 해서 하나나 둘만 갖자는 캠페인을 벌이곤 했었죠. "둘만 낳아 잘기르자."와 같은 불후의 명언들이 그때 나온 표어들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옆에 붙어있는 월세방 광고입니다. 저 광고는 담벼락집 주인이 직접 붙힌 월세방 광고인데요. 마치 그때 그 시절의 광고인양 잘 어울립니다. "방 널비 사방 10자" ㅎㅎㅎ
최신형 문짝이 달려있는 TV 광고입니다. 저 문짝에 자물쇠를 달아서 잠글 수도 있었죠. 아버지가 출근하시며 문을 잠궈놓고 열쇠를 가져가시면 아버지가 퇴근하실 때까지 TV는 그림의 떡이 되곤 했습니다.
그 아래에 있는 "월부판매"라는 말도 눈에 들어옵니다. 신용카드가 없던 시절이니 사람들이 고가의 제품을 구입할 때 한번에 돈을 내기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안 사자니 아쉽고... 이런 사람들을 위한 제도가 바로 "월부판매"였죠. 영업사원들이 월부로 구입한 고객들의 집에 매달 한번씩 찾아다니며 월부 장부를 들이밀고 수금을 해가던 모습. 돈이 없으면 월부쟁이(영업사원을 부르던 말)를 피해 다니는 분들도 계셨고...
그 시절의 주요 Issue는 무엇보다 반공이었습니다. 6.25 한국전쟁 이후 최근까지도 우리 사회의 주요 Issue이기도 하지만 그 때는 반공에 대한 개념이 지금보다 더 철저했죠. 삐라를 주워서 파출소에 가져다 주면 연필도 주고 공책도 주고...
안성 6070 거리는 이제 막 만들어지기 시작한 거리입니다. 안성시에서는 이 거리를 4단계로 나누어 추억의 거리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외형을 가꾸는데만 치중을 해서인지 체험해볼 거리는 많지 않습니다만... 체계적으로 발전된다면 우리가 어릴때 느꼈던 향수를 우리 아이들에게 체험해 볼 수 있는 좋은 체험의 장으로 태어나리라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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