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 이야기/차이나는 중국여행

우주에서 보이는 인공건축물. 장성(长城)

by 차이나는 스토리 2007. 8. 18.
반응형

 중국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요? 붉은색, 무공의 고수, 천안문, 자금성, 자장면(요건 한국건데..^^;;), 기름 범벅 요리들...

등등 수 많은 단어들이 떠오릅니다만... 중국을 대표하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만리장성(万里城, wan li chang cheng)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리장성은 동쪽의 산해관(山海, shan hai guan)에서 시작해 서쪽의 가욕관(嘉峪关)에서 끝이나는 총 연장 6,000여Km인 인간이 만든 인공구조물 중 가장 길고, 유일하게 달에서 볼 수 있는 구조물입니다.

 흔히들 만리장성은 진(秦, qin)나라의 시황제(帝, shi huang di)가 (일반적으로 진시황제라고 부르죠.) 명령을 하여 축조하였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춘추시대에 제(齊, ji)나라에서 부터 축조하기 시작해, 전국시대에는 연(燕, yan), 조(赵, zhao), 초(楚, chu) 등 여러나라에서 각각 축조했으며, 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통일하고 난 후 시황제의 명령으로 각 나라에서 쌓던 성을 증축 및 개축하여, 서쪽의 감숙성[甘肅省, gan su sheng] 남부 민현[岷縣]에서 황허강[黃河] 서쪽을 북상하여 인산[陰山] 산맥을 따라 동쪽으로 뻗어 랴오둥[遼東]의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장성을 구축함으로써 흉노(匈奴)에 대한 방어선을 이룩하였다. 다시 한대(漢代)에 이르러 무제(武帝)는 BC 2세기 말에 영토의 서쪽 끝인 둔황[敦煌] 바깥쪽의 위먼관[玉門關]까지 장성을 연장하였다.

진 ·한 시대의 장성은 현재의 장성보다 훨씬 북쪽에 뻗어 있었는데, 그것이 현재의 위치로 남하한 것은 거란(契丹) ·돌궐(突厥) 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즉, 북위(北魏)는 5세기 초에 장성을 보강하고, 중엽에는 수도 평성(平城) 부근에 또다른 성벽을 구축하였다. 또, 북제(北齊)는 6세기 중엽에 오늘날의 다퉁[大同] 북서쪽에서 쥐융관[居庸關] ·산하이관에 이르는 장성을 축조하고 다시 뒤이어 현재의 네이창청[內長城]에 해당하는 곳에 중성(重城)을 구축하였다. 한편, 오늘날의 허난성[河南省] ·산시성[山西省] 경계 북부를 타이항 산맥[太行山脈]을 따라 남하하는 장성도 북주(北周) 방어대책으로 그 무렵에 축조된 것인 듯하다. 그 후 수(隋)나라는 오르도스[鄂爾多斯] 남변에 장성을 구축했고, 당대(唐代)에 들어와서는 장성의 훨씬 북쪽까지 그 판도를 넓혔기 때문에 방어선으로서의 장성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또 오대(五代) 이후에는 장성지대가 북방민족의 점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방치되었다.

장성이 산하이관에서 자위관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를 갖춘 것은 명대(明代)에 들어와서였다. 영락연간(永樂年間:1403∼1424)부터 보강이 시작되어, 정통연간(正統年間:1436∼1449)에 내장성이, 성화연간(成化年間:1465∼1487)에 오르도스 남변의 장성이 수축(修築)되고, 다시 가정연간(嘉靖年間:1522∼1566)에는 동쪽 일대의 장성이, 15세기 중엽∼16세기 초엽에는 오르도스 서쪽 끝에서 란저우[蘭州]를 거쳐 자위관에 이르는 장성이 완성되었다. 명(明)나라는 이 장성지대를 9개의 군관구(軍管區)로 나누어 구변진(九邊鎭)을 두고, 장성을 통과하는 교통요지, 즉 옌먼관[雁門關] ·쥐융관 ·구베이커우[古北口] ·장자커우[張家口] 등지에는 견고한 관성(關城)을 설치하였다.

청대(淸代) 이후에는 군사적 의의를 상실하고, 단지 중국 본토와 둥베이[東北:만주] ·몽골 지역을 나누는 정치 ·행정적인 경계선에 불과하게 되었다. 한편, 축성의 재료는 햇볕에 말린 벽돌과 전(塼) ·돌 등이며, 성벽은 높이 6∼9m, 폭은 상부 4.5m, 기부(基部) 9m이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까지 만리장성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정말 만리장성의 길이만큼이나.. 설명도 깁니다. 

참고로 산해관은 예전 고려와 중국의 경계선이었다고 합니다. 산해관에 가면 천하제일관(天下第一关)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이 그 입구입니다. 전에 진황도에 갔을 때 산해제일관을 보고, 우리의 땅이 여기까지였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각설하고^^;;

 이제부터 북경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팔달령 장성(八达岭长城, ba da ling chang cheng)으로 가는길로 출발하겠습니다. 

 저의 출발지점은 언제나... 덕성문(德胜门)입니다. 덕성문에 대한 설명은 전에 강서초원에 갔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덕성문에 도착하시면

 이와같이 덕성문-팔달령이라고 쓴 푯말을 보실 수 있습니다.(덕성문 바로 뒷편입니다.) 이 사진을 찍을 때가 토요일 오전 9시경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있습니다. 팔달령을 가시려면 조금 더 서두르시는게 좋습니다.

 

 이 버스가 바로 덕성문과 팔달령을 직통으로 운행하는 919번 버스입니다. 919번 버스에 대해서는 강서초원글을 참고하세요^^

 

 가는 날은 날씨가 참 좋았습니다. 지난 4월에 다녀왔었는데... 봄의 북경하면 황사가 심할거라는 생각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었습니다만.. 쾌청한 날씨가 아주 기분 좋았습니다. 여기는 팔달령의 정문이 아닌 후문쯤 되는 곳입니다.^^ 919번을 타면 여기서 내려주죠. 정문으로 가고 싶으신 분들은 저 문을 바라보시고 왼쪽으로 약 500m정도 걸어가시면 정문이 나옵니다. 그 곳에서 케이블카를 타실 수 있죠.

  

 후문은 다른 이름으로 야생곰 동물원이라고도 합니다. 절대 야생곰들은 아닌듯 하죠^^. 곰을 우리에 가두고 사람들이 구경하며 먹이(사과를 팝니다. 1개정도를 잘라놓고, 한 접시에 3위안 정도 합니다.)를 던져주게 하는거죠. 우리나라에서는 천연기념물인 반달가슴곰이 여기서는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저 녀석들도 지리산에 갔으면 좋은 대우를 받았을텐데 T.T

 

 미끄럼차(滑)입니다. 팔달령 정문쪽에서는 케이블카로 올라가고, 뒷문쪽에서는 미끄럼차로 올라갑니다. 나름 재미있습니다.

가격은 편도 30위안, 왕복 60위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올라가는 편도만 구입하셔서 올라가고, 내려올때는 걸어내려오시는게 좋습니다.

대부분 그렇게들 하시죠^^

 

 

 다 올라왔습니다. 아직 이른 시기라서 그런가 산들이 푸르지가 않습니다. 푸른 산속에 있는 장성을 보는 것도 참 멋있는데... 그걸 보기는 어렵겠네요^^;; 아무튼 산등성을 타고 꾸불꾸불 이어진 장성은 정말 장관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조상을 잘 만나서... 천혜의 관광자원으로 인해 수입이 장난이 아니죠.

 

 

 봄에 갔더니 꽃들이 막 화사한 자태를 드러내기 직전입니다. 장성보다 꽃 구경에 신경이 팔렸습니다..^^;;

이미 팔달령은 여러번 온지라... 집사람을 위해 온길.. 아무래도 장성보다는 다른쪽으로 신경이 쓰이겠죠...

 장성에는 정말 수 많은 사람들이 옵니다. 다른 관광지처럼 유명한 사찰이 있는것도, 특별한 경관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아니지..장성 자체가 특별한 경관이겠군요.. 암튼 정말 많은 사람이 옵니다. 팔달령을 대략 6번 정도 왔었는데.. 언제나 (오전, 오후, 주말, 평일) 사람이 많습니다.

 

 

 저 기나긴 장성을 쌓기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장성은 한마디로 수 많은 사람들의 무덤이라고도 얘기 하더군요. 이민족으로 부터 지키기 위해 성을 쌓다가 그 지켜져야 할 사람들이 목숨을 잃다니.. 아이러니군요. 하긴 일반 민초를 지킨다기 보다는 소수의 황족과 귀족을 지키기 위해서였겠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올라가실때는 꼭 케이블카나 미끄럼차를 타시는게 좋습니다. 체력에 자신이 있으시다면 괜찮지만, 의외로 경사가 가파르고 계단으로 되어있어 무릎 관절 및 허벅지 근육이 고통을 호소할 수 있습니다.

 

 저 계단을 보니, 산동성의 태산이 떠오르는군요. 태산에 가면 6,666개의 계단이 있습니다.(물론 아무도 세어보지는 않았으니...) 그 계단을 통해 산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그리고 짐을 (산 정상에 있는 숙박시설 및 음식점에서 필요한 물건들) 나르시는 지게꾼들도 그 계단으로 올라가시고, 아무튼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한쪽에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광고판이 서 있더군요. 중국은 2008년 올림픽을 계기로 자신들의 위상 및 문화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리려고 상당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도시 곳곳에서 올림픽에 대한 구호 및 플랭카드를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88올림픽을 할때도 저랬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아무튼 88년도에는 호돌이가 선풍적인 인기였던것 만큼은 확실한데...

 

 걷다보니 우체국 건물이 보이네요. 예전의 모습을 그럭저럭 그대로 간직한... 참!!! 팔달령 장성 입장권이 카드로 되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가격은 똑 같으니 차라리 그걸 구매하셔서 이 우체국에 오셔서 한국에 계신 가족이나 친구 혹은 자신에게 추억을 보내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영화에서 보면 스위스의 융프라우에 가면 엽서한장 써서 가족에게 보내는 장면이 가끔 나오던데... 영화속의 주인공이 되어 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편지보내는 방법을 모르신다고요... 그럼 이 글을 참고하세요.

 

 이 사진은 덕성문에서 919번을 타고 갔던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팔달령을 가는 안내판입니다. 전문(前门, qian men)에서 출발하는 여행버스입니다. 전문 좌 / 우측에서 출발합니다. 요금은 윗 그림과 같습니다.

 

아래의 사진들은 참고용 사진들입니다.

 

 우선 이 사진은 팔달령을 가기전에 있는 거용관 장성 사진입니다. 사진 원본파일을 한국에 두고와서 싸이에 있던 사진을 받아서 왔더니.. 작게 올라가는 군요^^;;

 거용관 장성은 북경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장성입니다. 경사는 팔달령보다 급하고요. 거용관보다 팔달령이 더 유명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올라가서 보는 경치가 팔달령은 사방이 탁 트여있는 반면 거용관은 산으로 둘러쌓여 있기에 그렇지 않나 생각됩니다.

 

 

중국에서 유명한 관광지에 가보면 가끔 위와 같이 자물쇄가 달려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연심쇄(锁, lian xin suo)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즉 마음을 연결시키는 자물쇄라는 뜻이죠. 저기 보이는 빨간 리본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기도 하고, 자신의 소원을 적어두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성황당 옆 돌답에 돌을 쌓으면서 자신의 소원을 비는 행위나 절에 가면 기와에 자신의 소원을 적어 올리는 행위와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중국인들은 기복(祈福, qi fu - 중국어에도 이런 단어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신앙이 대단한 편입니다. 자신들의 복을 빌기위해 집 문앞에 복자를 붙혀놓기도 하고, 팔괘를 붙혀 집안에 들어오는 악귀를 막으려고도 하죠. 오래된 나무에 소원이 적혀있는 빨간 리본을 돌에 묶어서 던져 걸기도 합니다. 모두 기복의 한 방편이죠.

 

 이 사진은 아까 말씀드린 산해관, 즉 만리장성의 동쪽 출발점입니다. 지금이야 국제법상으로 중국의 영토이기에 우리가 찾는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우리의 기상을 잃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지난 반세기 이상 한반도에 우리 조상이 대대로 살아오면서 요즘처럼 중국과 대등한 입장에 서 있을때가 있었을까요? 늘 주군과 신하의 관계였거나, 중국의 눈치를 보며 왕위를 옹립했던... 중국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그래도 중국앞에서 당당하게 서서 그나마 눈치보지 않으며, 가끔은 경제적으로 요구도 하며, 의식적으로도 중국을 약간 아래로 내려보기도 하는 때가 지금입니다.

 

 사람들은 중국이 앞으로 10년만 지나면 우리나라를 추월할꺼라 얘기를 합니다. 물론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손을 놓고 지켜보고 있을 수 만은 없습니다. 우리가 더 많이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고,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겠죠.

 

 쓸데없는 사설이 상당히 길어졌습니다. 이 얘기는 나중에 정리해서 다시 한번 하기로 하고요^^;;

 팔달령 장성은 아이들과 함께, 가족들과 함께 가보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은 장소입니다.

반응형

댓글